격구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시작된 격구는 남북국시기의 통일신라와 발해에 전해져 정착된 마상 스포츠다. 발해인들은 고구려의 기질을 계승한 후예답게 격구를 특히 좋아했으며, 일본에 격구를 전한 것도 발해 사신에 의해서였다.

고려에서는 왕이나 무인들은 물론 여성들까지 격구를 즐겨 인가를 헐고 곳곳에 격구장을 넓히는 바람에 백성들의 원성을 살 정도였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긴 했지만, 남성적인 마상의 스포츠를 즐겼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롭다. 우리 민족의 피 속을 흐르는 기마적 속성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격구(擊毬)는 말을 타고 장시(杖匙)라는 채를 이용해 공(木毬)을 쳐서 상대방 문에 넣는 경기이다. 예로부터 문관이나 민간사회에서 무예의 하나로 행해졌다.이것을 민간에서는 '공치기' 또는 '장치기'라고도 하며 한자어로는 '타구(打毬)'격구희(擊毬戱)'농장희'(弄杖戱)',격봉'(擊捧)'이라고도 한다. 중요한 무예의 하나로 크게 성행하였다.   중국에서는 북방민족인 요나라나 금나라 사람들이 이를 즐겼으며,최치원이 당나라에 머물렀을 때에도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격구의 종류에는 마상격구와 지상격구(보행격구)의 2가지가 있다. 즉 말을 타고 행하는 기마병의 훈련용 마상격구와 지상에서 도보로 행하는 귀족층의 지상격구로 나뉜다. 마상격구는 병사들이 모화관(慕華館) 또는 기타 넓은 광장에서 마상 궁술(騎射)과 함께 행한다.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 시행하였는지 알 수 없다. 《해동역사》의 일본관련 내용과 《구당서》의 발해 관련 내용을 보면, 격구는 신라나 고구려 등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 병사에 의해 전해졌으며, 고구려의 유민에 의해 발해에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격구는 무예를 숭상하던 고려시대에 와서 크게 성행하였다. 특히 고려시대에 무인들은 마상무예를 기르기 위해 격구를 즐겼다. 특히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격구는 군사적 목적에서 무관들의 훈련용으로 쓰였으며, 귀족들의 놀이로서 행해지기도 했다. 왕과 귀족들은 격구를 사열하고 즐겼으며, 상으로 비단, 포목, 돈 등을 내리기도 하였다.    고려 의종 이후에는 차차 국가적인 오락행사가 되었으며, 특히 궁중에서는 단오절에 이를 성대하게 벌였다. 격구가 성행하여 한때,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사치로 흐른적도 있어 예종이나 충혜왕은 격구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에 와서도 격구가 성행하였다.《용비어천가》에도 격구에 관한 기록이 있다.(용비어천가,제44장) 특히 세종대왕은 격구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격구를 잘하는 사람이라야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할 수 있으며, 창과 검술도 능란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요한 무예의 하나로 여겨서 정기적인 군대열병식에는 반드시 이를 실시하였고, 또한 무과시험 과목에까지 포함시켰다.

 현대에 와서는 (사)한민족전통마상무예·격구협회에 의하여 최초로 복원 발표되었다.(1997. 문화유산의 해 조직위원회 전통마상무예,격구 공식 복원발표)

 마상격구는 기마격구라고도 한다. 이것은 무관들이 구장에서 말을 타고 장시로 공을 쳐서 구문에 들여 보내는 놀이이다. 주로 기마술의 습득이나 기마병의 훈련용으로 쓰였다. 일반적으로 격구라 하면 마상격구를 지칭한다. 이러한 기마격구는 구문(球門, 골대)을 세우는 위치, 개수, 구문의 형태에 따라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우리의 마상격구 방식은, 먼저 한쪽 끝에 구문을 세우고 다른 쪽에서 두 편이 일제히 말을 달려, 규정에 따라 서로 공을 차지하려고 경쟁하면서 구문 사이를 통과하는 방법이다. 단구문을 설치해 공을 넣는 방식은 일본의 타구나 폴로도 마찬가지이다. 즉, 말과 말이 서로 맞부딪치니 아니하고 한 쪽 목표물만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2. 중앙에 단구문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경기장 중간에 하나의 구문을 세우고 양편에서 서로 공을 쳐서 넘기거나 구멍을 통과시키는 방식이다. 단구문은 2개의 기둥을 세운 다음, 기둥 사이의 윗 부분에 나무판을 대고 그 중간에 큰 구멍을 만든다. 그리고 밑에는 그물을 치거나 나무판을 대서 막는다. 따라서, 한 편에서 친 공이 구멍을 통과하게 되면 1점을 얻게 된다. '포구락'과 유사한 형태이다.

 3. 또 하나는 쌍구문 격구이다. 구문을 축구와 같이 양 쪽에 마주 세워놓고 양 편이 공을 서로 빼앗아 반대편의 구문을 통과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상대방과 서로 마주 보고 경기를 하기 때문에 매우 격렬하고 부상의 위험성이 높다. 현재 한민족 전통 마상무예협회에서는 쌍구문 격구를 주로 시연하여 민족 전통스포츠로서의 격구를 좀 더 다이나믹하게 진행함으로써 격구의 무한한 스포츠적 잠재력을 널리 알리고 있다.

또한 마상격구도 공을 1개만 사용하느냐, 여러개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일본식은 여러 개의 공을 각각 구문 속에 넣는 방식이다. 따라서 격렬한 접전이 없는 대신 개인의 기량을 위주로 한다. 이럴 경우 구장의 크기도 축소된다.
한편 공을 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폴로의 경우는 공을 치는 방식만 있지 우리처럼 장시안에 채 가지고 달리는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술이 단조로운 대신에 치밀한 작전이 필요하다.
그리고 구문의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데 공을 쳐서 구문 사이를 통과시키느냐, 아니면 일정한 구조물의 공간 사이를 말을 타고 통과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장시:끝이 숟가락 모양의 긴 채이다. 이것은 크게 시부(匙部)와 병부(柄部)의 2부분으로 나뉜다. 시부는 숟가락 모양의 둥근 부분을 말하며, 병부는 시부 밑에 달린 긴 자루를 말한다

주칠목환 :공에 해당되는 것으로 나무를 둥글 게  깍아서 그위에 붉은색 옻칠을 해서 입힌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위에 수놓은 비단으로 감싸기도 한다.

모구 공에 해당되는 것으로 돼지방광으로 만든다.

무영전 :이것은 방울이 없는 화살이란 뜻이다. 모구에 쓰이는 일종의 화살로 화살 끝부분의 속이 무명으로 입혀있다.

 

1.비이(比耳): 처음에 말을 기(旗)아래쪽으로 출발시키되 장시(杖匙)를 말의 목과 귀있는 곳에 가지런히하여 비스듬히 둔다. 이것을 比耳라고 한다.

 

 2.할흉(割胸): 장시(杖匙)를 말가슴에 가까이댄다. 이것을 할흉(割胸)이라고 한다. 

 3.방미(防尾): 몸을 기울려 위를 향하여 누운자세로 장시(杖匙)를 말의 꼬리부분에 갖다댄다. 이것을 방미(防尾)라고 한다. 

 

 4.배지(排至): 말을 달려 공이 떨어진 곳에 가서 장시(杖匙)의 안쪽으로 비스듬히 공을 끌어당겨 공중으로 높게 친다. 이것을 배지라고 한다.

 5.지피(持彼)또는 (구울방울): 장시(杖匙)의 바깥쪽으로 공을 밀어 던지는 것을 지피라고 한다. 또한 도돌방울 이라고 한다. 비이의 자세로 왼쪽으로 돌라 할흉(割胸)을 하며, 다시 방미한다. 그리고 공이 떨어진 곳에 가서 공을 끌어당기는데 이것을 구울방울(轉鈴)이라고 한다. 

 6.수양타(垂揚打) : 공을 때리는 기술이다.

 7.수양수(垂揚手): 비이(比耳)한 후에 손을 들어 마음대로 친다. 그리고 손을 높이 들고아래고 곧게 드리워서 의기양양(揚揚)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수양수라 한다.

   8.수양타는 수양수의 동작의 과정에 속하는 것이다.   
 

현대의 격구는 (사)한민족전통마상무예 격구협회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다. 무예도보통지를 비롯한 역사 문헌들을 치밀하게 고증하여 이를 현대에 맞게 재구성함으로써 전통스포츠로서의 격구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하고 또한 이를 다져나가고 있다. 현대의 격구 역시 마상격구와 보행격구로 나뉜다. 마상격구는 쌍구문 격구를 주로 시연하고 있으며 보행격구 또한 구기종목의 활달함을 살려 하키와 유사한 형태로 복원하였다. 1997년 문화유산의 해 조직위원회 전통마상무예,격구를 공식 복원발표한 (사)한민족전통마상무예격구협회에서는 1998년.12. 1일 순천향대학교 하키팀과의 지상격구(보행격구)시합울 가짐으로서 건국이래 최초로 순수 민족구기종목으로서,  앞으로 격구가 새로운 현대 스포츠로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 우리 문화사에 한 획을 긋는 계기를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