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상재

말 위에서 부리는 각종 곡예를 마상재라고 한다. 마상재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태조 이성계에 관한 것이다. 1362년 7월에 이성계가 원나라 군대와 싸울 때 적장이 찌르는 창을 몸 숨기기(등리장신)동작으로 피하였다. 이러한 기록에서 마상재는 마상무예의 일종으로 이미 고려 때에 이미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인조때에는 일본 정부의 간청에 의하여 마상무예에 뛰어난 장효인과 김정등이 사절단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서 마상재를 선보였으며 그 뒤로는 사절단에 반드시 마상무예에 뛰어난 인물들이 동행하게 되었다. 효종 3년에 왕은 "관무재"를 행하고 마상재를 시험하였으며 북벌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효종이 마상무예를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에 사신으로 간 박경행은 "전쟁터에서 총,칼,창이 들어오고 깃발이 휘날리며 북소리가 요란할 때, 말에 몸을 숨긴 채 적진에 돌입하여 적의 깃발을 빼앗거나 적군의 목을 베어올 수 있는 날랜 재주를 지닌 사람이 우리 나라에 사,오백명은 된다."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일본인들은 마상무예에 경탄한 나머지 이것을 모방하여 다아헤이본류(大坪本流)라는 승마기예의 한 유파를 만들기도 하였다.

 덕천(德川) 쇼군이 가광시대에, 그의 요청에 의해 기마술이 능한 마상재인 2명이 조선통신사와 함께 수행하였다. 그래서 강호성(지금의 동경)내에서 쇼군과 막부의 고관, 유명 번주들앞에서 각종 마상기예를 펼쳐 보였다. 당시 일본의 화가들이 그린 마상재도(馬上才圖)이다.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갔을 때 마상재를 시연한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마상재 기술의 명칭이 그림에 기재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마상재의 기술에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현대의 마상무예는 한민족전통 마상무예·격구협회에서 무예도보통지를 비롯한 역사적 문헌과 사료를 수집 분석하여 이의 형태를 재현한 후 지난 10여년간의 직접적인 실연을 통하여 2002년 10월 마상재와 마상무예의 모든 것을 완전히 복원해 내었다. 지난 2002년은 마상무예 복원이 완결된 해인 것이다.



마상재의 복원은 다른 마상무예와는 달리 그 복원 과정에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상재란 기술이 말위에서의 고난도 기예라는 점에도 그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한민족전통 마상무예·격구협회의 복원 방침이 몽고나 기타 다른 나라의 서커스적인 요소에서 탈피하여 무예도보통지에 충실한, 전투적 개념에서의 방향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외국의 마상재 시연을 살펴보면 먼저 그 시연장이 자그마한 실내공간이기 때문에 말의 구보속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그리고  말이 원형공연장을 회전하면서 뛰기 때문에 사람의 중심이동은 그만큼 쉽다고 할 것이다.
 
한민족전통 마상무예·격구협회에서 복원한 마상재는 먼저 트인 공간에서 시연을 하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고난이도이며 이는 세계최고라 할 수 있다. 트인 공간에서는 말의 이동행로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고도의 기마술과 집중력, 말의 제어기술이 요구되는 것이다.
 
특히 실전적 개념의 교전 마상재는 세계최초로 시도하는 것으로서,  여러명이 교전하는 속에서의 마상재는 서로 앞으로 달려나가려는 말의 습성 때문에 최고의 기예를 보유하지 않으면 시연 자체가 힘든 것이다.
실제로 연습과정에서 많은 위험한 상황과 부상이 속출하였으며 이를 정신력과 끊임 없는 노력으로 극복하였다.
 

마상재는 2003년 5월 18일 한국마사회 제8회 경마문화제에서 최초로 공식 복원 발표 되어 많은 관심과 격려를 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