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상무예
무예는 고도로 기술화된 정련된 행위이다. 마상무예는 사람만의 단독행위가 아닌 말과도 혼연일치를 이루는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기 때문에 무예의 최고봉에 있다.
마상무예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기마에 적당한 상태로 길들여야 한다. 말은 익숙치 않은 물체를 보면 비껴가는 성격이 있기 때문에 물체에 익숙하도록 훈련을 하여야 한다. 말은 원래 겁이 많기 때문에 갑자기 놀라 사나운 모습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물체와 익숙해지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따라서 마상무예처럼 목표물을 설정해서 가격하거나, 상대와 교전을 할 경우에 목표물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여서는 안되므로 숙달된 반복훈련이 필요하다.
또한 기마는 일반 승마에 비해 낙마의 위험성이 높다. 낙마시에는 목과 허리, 다리에 가장 큰 충격을 입는다. 마상무예는 중심이동을 효과적으로 가져가야 한다. 찰나의 순간에 말이 달리는 가속력, 회전할 때의 원심력, 손에 들고 있는 무기의 길이나 무게 상체의 움직임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판단이 이루어져야 한다.
[마상무예의 역사]
말 위에서 여러 무예를 보여주는 마상무예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미 부여에서는 명마(名馬)가 나왔으며, 활.화살.칼.창 등을 쓰는 병사가 있었다는 점으로 보아 활을 쓰는 기병(騎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상무예는 기원전 5~6세기경부터 말 사육과 더불어 시작되었으며, 특히 수렵용과 전시용으로 함께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대륙의 기마민족과 싸우면서 기마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따라서 마정(馬政)과 전마(戰馬)의 확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는북방민족과의 싸움을 통해 기병의 중요성을 일찍 터득하였다. 따라서 기병 및 기마술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에서 마상무예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은 고분 벽화이다.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에 전하는 5~6세기의 고구려 고분에는 수렵도(狩獵圖)가 그려져 있다. 무용총(舞踊塚)에 있는 수렵도는 산악지대에서 4명의 말을 탄 무사가 활을 쏘며 사냥을 하는 모습이다. 전방을 향해 쏘는 무사가 호랑이를 쫓아가면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으며, 다른 장면은 상체를 뒤로 돌린 무사가 활시위를 당기면서 우후방에 있는 사슴을 향해 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고구려에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사냥대회를 열었다. 왕은 말 타고 활 쏘는 재주가 뛰어났으며, 이 때짐승을 많이 잡은 사람에게 용사라는 칭호를 주었다.한편 수렵에 뛰어난 기사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 전시에기마병이 사용되었음을알 수 있다. 그리고 4세기의 안악 3호분에 그려진 마사도(馬舍圖)를 보면, 이미 말을 사육하는 마사가 나타난다. 따라서 마정(馬政)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안악3호분 마사도
한편 백제와 신라의 수렵도는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기마전에 대한 기록이 다수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말을 타고 행하는 수렵의 형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통일 신라 시대에도 무사가 말을 달리며 수렵, 동물을 쫓는 장면을그린 벽돌(塼)이 남아 있다. 이 그림을 보면 등에는 활을 메고, 오른손에는 칼을 세운 무사가 노루를 향해 쫓아가는 모습이다. 당시에 수렵이 성행하였음을 엿보게 한다. <삼국사기>에는 기병에 대한 기록이 다수 나오는데, 고구려.신라.백제 모두 기병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신라,백제에 비해 고구려는 기병에 대한 기록의 횟수도 많고, 시기 또한 빠르다. 따라서 고구려의 기마술이 일찍이 발달하였으며, 그 규모도 훨씬 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발해에서도 말을 타고 공을 치는 격구라는 놀이가 성행했으며 이를 통해 무예를 연마하기도 했다.
고려는 신기군(神騎軍)이라는 기병이 있었다. 고려 숙종 9년(1104년)에 윤관의 건의로 여진을 정벌하기 위한 목적의 별무반을 두었다. 이 별무반에는 기병을 중심으로 한 신기군, 보병을 중심으로 한 신보군, 승려를 중심으로 한 항마군이 있었다. 신기군은 여진의 기병에 대항하기 위해 편성된 특수부대로 문무 양반, 이서, 상인,노예 및 양인 중에서 말을 가진 자는 모두 편입시켰다.
무인 집권시에는 마별초라는 기병제도가 있었다. 최우(崔偶)는 날마다 마별초로 하여금 기사를 단련시몄으며 수렵을 즐겼다. 마별초는 최우가 몽고의 영향을 받아 편성한 것이다.
고려시대에 무인들은 마상무예를 기르기 위하여 격구를 즐겼다. 무예를 숭상하던 고려시대에 격구가 크게 성행하였다.
기사는 조선 후기 까지 무예의 하나로 중요시 되고 수렵활동에도 기동성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총의 발달로 그 위력을 점차 잃게 되었다. 세종대왕은 "격구를 잘하는 사람이라야 능히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할 수 있으며 창과 검술도 능란하게 된다." 고 말해 군사적 목적에서 격구를 장려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격구를 중요한 무예의 하나로 여겨 정기적인 군대열병식에서 반드시 실시하였고 무과시험과목에까지 포함시켰다.
18세기에 일본에 사신으로 간 박경행(朴敬行)은 마상재(馬上才)를 보여주면서 적진에 침투할 수 있는 날랜 기마병사가 사오백명은 된다고 말하였다. 일본인들이 이 마상재를 받아들여 다이헤이본류(大坪本流)라는 승마기예의 한 유파를 만들기도 하였다.
[무예도보통지와 마상무예]
마상무예가 체계화된 것은 1790년(정조14년)에 이덕무와 박제가가 무관인 백동수의 도움을 받아 펴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의한다. 여기에는 기창(騎槍), 마상쌍검, 마상월도, 마상편곤 4기와 격구, 마상재 2기등 모두 6기의 마상무예가 포함되어 있다. 『무예도보통지』가 실학자가 주도하여 간행된 것은 당시에 마정이 약화되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곧 실학자들이 기병의 확대와 체계화를 주장한 시점에서 이 책이 나온 것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글에도 마상재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가 지은 '마상재'라는 제목의 한시의 내용을 보면 날쌘 말을 가을 매가 창공을 가르는 모습에 비유했으며, 또한 솟은 갈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달리는 말위에 올라타기, 말위에 서 이씩, 말등 넘나들기, 말위에 가로눕기, 말옆구리에 몸숨기기, 말위에서 뒤로 눕기등의 기교가 묘사되어 있다. 결국 기마전에 마상재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리고 '척씨네 무예 18가지 중에서도 말타는 기예만은 우리 나라에 졌다네' 라는 구절에서 우리의 기마술이 중국보다 뛰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척씨네 무예란 중국 명나라의 척계광(戚繼光, 1527~1587)이 정리한 『기효신서』의 무예를 말한다.
당시 이덕무, 박제가, 정약용 등 실학자들이 부국책의 일환으로 무예의 발전을 꾀했으나 큰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다 일본이 침략하면서 모든 전통 마상무예의 전승이 중단되고 말았다.
[현대의 마상무예]
현대의 마상무예는 한민족 전통 마상무예·격구협회에서 『무예도보통지』에 근거하여 복원하였다.『무예도보통지』는 기존 무예를 집대성하여 24기(技)를 완성한 종합 무예서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헌이다. 그러나 『무예도보통지』는 편찬에 참여한 인적 구성이나 편찬 과정을 보아서 실제 무예를 전수하는 무관이 주도하지 못하였으며 특히 마상무예는 실제 무예 기능자가 참여하지 못하였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이 견해이다. 이러한 점에서 기마를 위한 말 고르기, 말 길들이기, 낙마방지법, 마상무예 실연상의 문제점 등 실제적인 내용이 누락되어 있다. 더구나 마상무예는 구한말에 이미 전승이 끊어졌기 때문에 마상무예를 복원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직접 현장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하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상무예를 복원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루를 멀다하고 낙마에 의한 부상자가 속출하였으며 재정적 뒷받침이 전무한 상태에서 오로지 정신력 하나로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사람의 숨통을 죄는 경제적 압박감과 낙마에대한 신체적 부담감, 행사때의 안전성 고려,말의 운반문제등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선조들의 웅혼한 기상을 이어간다는 사명감 하에 끊임없는 수련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지금에 이르른 것이다.
현대의 마상무예는1980년도 초부터 연구에 착수하여 1994년 8월 28일 최초로 공식 복원 발표되었으며 2002년 10월 1일 마상무예의 모든 복원을 완결하였음을 공식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은 마상무예에 관한 한 세계 제일의 실력과 기술을 갖추게 되었다.